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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류환
잠파노

방명록

 

리해진/ 아새끼
 2013. 7. 30. 01:15

해랑은 어린 애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차라리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귀찮다는 점 때문이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데 아새끼 일일이 챙기는 짓을 어케 하네? 류환이 해진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 해진을 보면서 해랑이 한 말이었다. 해랑의 눈엔 해진도 마냥 어린 애였다. 해진이야 물론 해랑 동지가 절 왜 챙깁니까? 전 아새끼가 아닙니다. 하고 서릿발 날리는 태도로 뻣뻣하게 대꾸했지만 류환도 해진을 아직 어리게 보는 건 매한가지였다. 

 

해진은 억울했다.

 

저도 다 컸단 말입니다! 소리치고 싶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제도 바로 그런 날(해랑과 류환이 절 빼놓고 둘이서만 술을 마시면 해진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이었는데, 해진은 눈 앞의 상황을 보며 이제 그딴 건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류환을 빼닮은 남자아이가 화장실 거울 앞에서 삐쭉 올라간 눈매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장?

 

해진은 홀린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설마 조장이겠어, 하는 반신반의가 섞인 물음이었지만 사실 조장이라는 확신이 9할이었다. 일단 류환이 어젯밤 입고 있던 옷을 걸친 상태였고(품이 큰 반팔 티셔츠. 지금 보기에는 꼭 원피스 같았다.) 저 눈매나 귀엽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누가 봐도 류환이었던 데다가, 해진이 종종 '조장의 어릴 적 모습'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때 추측해 본 '약 10세 전후 류환의 얼굴'과 상당히 유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꼬마애는 다만 눈썹을 기운없이 무너뜨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제 발이나 손바닥, 입고 있는 옷을 한 번씩 더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해진은 맘 같아서는 당장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가 저 조그마한 몸을 끌어안고 싶었다. 지금 상황이 꼭 양키들이 만든 영화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현실이긴 하지 않은가. 일단 해진은 지금 어떻게 해야 좋을까 머리를 굴렸다. 해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벅찬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류환(으로 추정되는)이 짧은 보폭으로 쪼르르 제 앞까지 걸어오기 전까지는. 슬리퍼가 커서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마저 해진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평소엔 해진이 류환을 올려다봐야 했는데, 지금은 류환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목이 꺾일 만큼.

 

류환은 약간 심통이 나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눈썹은 여전히 축 쳐져있고, 아랫입술은 부루퉁하게 나온 채로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걸 강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약간 촉촉한 것 같기도 했다. 해진은 류환을 내려다보는 동안 손이 조금 떨려와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해진은 다시 한 번 불렀다.

 

조장?

 

류환은 대답 대신에, 해진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키가 조금 높아진 걸 봐서 까치발을 한 것 같기도 했다.

 

안아달라.

 

이상하게도 해진은 그 순간 이 모든 게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저건 귀여워도 너무 귀여웠다. 아무리 어린 류환이라도 맨 정신으로 저렇게 굴 리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해진은 멍청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 되물으면서 입 안을 어금니로 꽉 깨물었다. 행복하긴 했으나 꿈이라면 빨리 깨는 게 잠들어있는 스스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자다가 돌연사를 하는 건 해진의 인생 계획엔 절대 없는 일이었다. 해진은 오래오래 류환과 함께 살아야했다.

 

그러나 아픔은 지극히 현실의 것이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해진은 이미 류환을 품에 안고 있었다. 류환이 해진의 목에 팔을 감은 채 매달려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니 이렇게 돼 있지 않갓서?

 

류환은 해진의 어깨에 얼굴을 푹 묻고 말했다.

 

꿈인 줄 알았는데 기것도 아니고.

 

해진은 류환의 등을 토닥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류환의 등이 제 손바닥에 폭 덮이는 느낌이었다. 목을 감은 류환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해진은 정말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해결책이 있을 겁니다. 속삭이며 몸을 돌리자 방금 막 깼는지 배를 벅벅 긁으며 방문을 열고 나오는 해랑과 눈이 마주쳤다. 해랑은 하품을 하다 말고 표정을 이상하게 굳혔다. 필시 해진이 안고 있는 작은 몸뚱어리 때문일 것이었다. 

 

거 품에 아새끼는 뭐네?

 

벌써부터 '매우 귀찮아서 짜증이 나려고 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해진이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찰나 류환이 목을 빼고 해랑을 돌아봤다. 해랑은 '저 원류환 쏙 빼닮은 아새끼는 뭐네'라고 해진에게 다시 묻고 싶었다. 그 전에, 아새끼 아니다. 류환이 짐짓 무겁게(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어려서 무겁기는커녕 통통 튀었다.) 말하자 해랑이 코웃음을 쳤다. 

 

건방진 게 꼭 너 보는 것 같다야. 근데 느이 조장 숨겨둔 아새끼라고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니간?

그게..

 

해랑이 흠칫했다.

 

설마 진짜야?

그게 아니라..

 

그냥 말하라. 그건 류환의 목소리였다.

 

..조장의 애가 아니라. 조장입니다.

 

집 안에 적막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