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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앞 인물은 왼쪽에 위치하는 인물
비밀번호: 원류환 나이 (only 숫자)



원류환
잠파노

방명록

 

남자는 물기를 머금은 솜 같았다. 비가 쏟아져내리는데도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장대비였다. 해진은 이 비를 그대로 맞는다면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거라고 생각했다. 해진은 남자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남자와 자신 사이에 우산을 두고, 한쪽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남자는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날씨에, 이런 곳에서 잠들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해진은 남자를 부르기 위해 '아저씨'와 '형'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저기요.." 가장 무난한 지칭어를 선택했다. 어깨 위에 얹은 손으로 뺨을 조금 세게 치고, 다시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힘없이 축 늘어져있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손에서 어깨가 빠져나가는 느낌은.. 해진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잠시 동안 멀어진 의식 너머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 저기.. 해진은 멍청하게 남자가 기대고 있던 대문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천천히 다시 남자에게로 옮겼다. 


남자는 머리가 짧았다. 단정하게 생긴 귀 밑에는 어떤 낙서같은 선이 그려져 있었다. 해진은 그 낙서에서 이유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낙서를 매만졌다. 일직선의 선 몇 개와, 숫자들. 

 

바코드였다.


"..안드로이드?"




해진은 안드로이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지만 고장난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알았다. 매체들은 종종 인간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들의 폐기 공정을 보도하며 비인간적인 행태라고 비난했다. 해진은 이 남자가 뉴스에서 보았던 그 안드로이들처럼 처리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팔과 다리가 꺾이고, 피부가 찢어지고..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해진은 우산을 바닥에 내려놨다. 누워있는 남자의 상체를 잡아 올리고 그 뒤로 가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가까스로 일으키기는 했는데 가볍지는 않았다. 일단 키차이가 있었다. 해진은 남자를 '옮긴다'가 아니라 '질질 끌고 간다'에 가깝게 부축했다. 도어락을 푸는 동안 남자는 몇 번이나 해진의 품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쓰러질 뻔했다. 가까스로 붙잡는 대신 젖은 티셔츠가 배 위로 말려올라갔다. 하지만 해진에게 그것까지 신경쓸 틈은 없었다. 너무 더웠다. 해진은 제 몸이 비로 젖은 건지 땀으로 젖은 건지 헷갈렸다.


해진은 문을 열자마자 남자를 거실 입구에 거의 내던지다시피 내려놨다. 신발을 벗기기 위해 발로 손을 뻗었는데,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끌리느라 생긴 찰과상만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피 대신 흰색의 유액이 흐를 뿐이어서 해진이 죄책감을 가질 일은 없었다. 해진은 남자의 옆에 풀썩 주저앉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해진과 남자의 주변은 이미 홍수라도 난 것처럼 물바다였다. 해진은 빗물을 머금어 더 무거워진 가방을 얼른 벗고 그 안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심각하게 젖지는 않았지만 내일이면 쭈글쭈글해질 게 분명했다. 해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내일부터 방학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젖은 양말을 대충 벗고 일어나 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는 동안엔 남자에게 입힐 만한 옷이 있는가 가늠했다. 사실 고민해야할 것은 따로 있었지만, 그 점에 대해선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해진은 수건으로 남자의 얼굴이나 드러난 팔, 다리를 닦아냈다. 그러나 입은 옷이 젖은 이상 물기를 닦는 짓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해진은 남자의 상의를 가위로 잘랐다. 벗기기 위해 힘을 빼는 것보단 그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방에서 가져온 품이 큰 티셔츠를 입혔다. 남자에게도 크기는 했지만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아래였다. 반바지는 벗기기엔 편해도, 벗기는 과정이 곤욕스러웠다. 속옷은 더 문제였다. 해진은 안드로이드의 나체를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안드로이드를 실물로 보는 일조차 드문 해진이었다. 해진은 잠시 이마에 손을 올리고 고심하다가, 결심한 듯이 손을 뻗었다. 위만 뽀송뽀송한 것도 조금 웃긴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바지를 끌어내리자 검은색의 드로즈가 보였다. 해진은 잠시 여기서 그대로 바지만 입히면 되지 않을까..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드로즈와 남자의 골반 사이에 양 검지를 끼워넣었다. 남자의 발에 상처를 냈을 때도 떠오르지 않았던 죄책감이 드로즈를 벗기는 순간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을 질끈 감고 내린 다음, 맹인처럼 바닥을 더듬다가 수건을 집어 남자의 아래와 허벅지의 물기를 닦았다. 수건이 어느 곳을 스쳤을 때 묵직하고 물컹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해진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살짝 떴다. 아.. 그건 감탄과 탄식의 중간쯤에 위치한 어떤 감정이었다. 감탄에 가깝기는 했다. 아니, 해진은 정말로 감탄했다. 그러니까.. 이토록 발전한 이 시대의 과학에 대해.


남자에게 옷을 모두 입힌 뒤, 해진은 아버지가 쓰는 침대에 남자를 눕혔다. 날이 밝으면 깨어나길 바라면서.




해진은 코끝을 간질이는 구수한 냄새에 잠에서 깼다. 해진이 생각하기에 이건 된장국 같았다. 


그러나 해진은 어머니가 죽은 이후, 아침에 깨어나 음식 냄새를 맡아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내려오면 아침엔 해진이 음식을 했고, 아버지가 없는 동안은 아침을 거르는 일이 빈번했다. 해진은 자신이 사는 집에 '잠을 자는 곳'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해진은 혹시 아버지가 온 것일까 생각했다가, 그가 이미 일주일 전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해진은 이상함을 느꼈다. 잠에서 덜 깬 뇌는 어제 밤의 일을 재빨리 떠올리지 못 했다. 해진은 이불을 걷어차고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방에서 뛰쳐나와 주방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나서야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장대비. 턱 끝으로 떨어지던 빗방울. 젖은 교과서. 드로즈.. 거기까지. 해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적어도 폐기될 일은 없겠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남자가 뒤를 돌았다. 티셔츠가 너무 커서 소매가 팔의 반절을 덮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주인님. 남자가 친절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해진은 남자가 두르고 있는 녹색 앞치마보다 '주인님'이라는 호칭이 더 어색하고 거북했다.


"된장국을 끓였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해진은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누군가 거울을 가져와 제 얼굴을 비춰 보여준다면 매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틀리진 않았다. 해진이 거실 한 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는 동안, 남자는.. 안드로이드는.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국을 젓다가 한술 떠 간을 보았다.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해진은 그 모습에서 아주 익숙한 향수를 느꼈다. 해진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 시선을 피해 식탁으로 가 앉았다. 남자의 모든 행동은 대체로 자연스러웠다. 본래 함께 지내왔던 가족이나 친구의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만큼.




"저기.. 이름이 뭐야?"  


해진은 밥을 한 입 떠먹은 뒤 물었다. 해진은 남자에게 반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이 '안드로이드'에게 말을 높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안드로이드를 접할 기회가 없는 계층조차도 안드로이드에겐 하대하는 것이라고 교육 받았다. 인간은 안드로이드의 창조주였으니까. 당연했다. 그게 그들의 논리였다. 그럼에도 해진은 불편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었으므로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어 식사 대신 해진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던 남자는 해진의 질문에 입을 작게 벌렸다가, 다물었다.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해진은 그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에 짧게 감탄했다. 그리고 남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발음하는 것에 가까웠고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기계 같았다. 


"비피 다시 오천사백사십육."  


하지만 그건 이름이 아니라 모델명이었다. 안드로이드에 문외한 해진마저도 BP-5446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현대 과학이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의 극치,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 비파성의 야심작].. 해진은 BP-5446의 완성 이후 늘 꼬리표처럼 뒤따르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눈앞의 안드로이드는 정말 인간다웠으니까. 이를 테면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이나, 보여주는 몸짓 같은 것들. 

입술을 짓씹는다. 식탁 위에 놓인 제 손에 시선을 둔다. 다시 시선을 올려 해진을 본다. 눈썹이 축 처진다. 허물어지게 웃는다.. 그 일련의 것들은 인간의 것에 비유하자면 '슬픔'을 애써 감추는 행위와 거의 비슷해 보였다. 마주하고 있는 눈동자는 감정이 담긴 진짜 인간의 것 같았다. 해진은 만일 남자의 귀 밑에 있는 바코드를 보지 못 했더라면, 남자를 안드로이드라고 의심조차 못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진은 이내 궁금해졌다. 저런 표정을 짓는 안드로이드의 사정과 진짜 이름이. 하지만 먼저 물어볼 것은 따로 있었다.


"..갈 곳은?"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마치 가출한 사춘기 소년 따위를 떠올리게 했다. 남자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해진에게 전해졌다. 손가락을 가만 두지 못 했고, 입술을 자꾸 깨물었다. 해진은 아주 무심코 입술이 상할 텐데.. 따위의 걱정을 했다. 그러나 저건 기계였다. 그러나 기계 주제에, 당장이라도 불안에 잠식될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해진은 어제 미처 발견하지 못 했던 남자의 팔뚝과 목덜미에 있는 흉터에 눈길을 두다가 말했다. 

 

"당분간은 여기 머물러도 돼."  


어차피 혼자 지내는 집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출 청소년'은 얼굴을 들었다. 그래,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보이기는 했지만 소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어보이는 외관이었다. 남자는 기쁜 듯이 웃었다. 해진은 웃지 못 했다. 엉망이 된 남자의 입술이 보였다. 피가 흐르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입술엔 인공 색소를 넣어 피와 유사한 액체를 주입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피가 날 때까지 물어뜯다니. 넌 아픔을 못 느껴? 그건 다소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남자는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아뇨. 느껴요."


해진은 집으로 옮겨지는 동안 바닥에 잔뜩 긁혔던 남자의 발을 떠올렸다. 대답을 듣는 순간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죄책감이 뒤늦게야 몰려왔다. 쓰라릴 텐데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지. 해진은 밥을 다 먹으면 구급상자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설거지를 하겠다는 걸 말리고 소파에 앉혔다. 여기 가만히 있어. 남자는 해진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기만 하였다. 해진은 책상 아래에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돼 있던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 후, 불자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도무지 쓸 일이 없었는데 이런 계기로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남자는 걸어오는 해진의 손에 들린 상자를 보고 나서야 괜찮아요. 하며 손사래를 쳤다. 저런 것도 프로그래밍 된 것일까. 해진은 알 수 없었다. 내가 안 괜찮아. 단호하게 자르고 남자의 앞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가는 발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겨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상처를 들여다봤다. 딱지가 앉는 대신 유액이 굳어 껍질처럼 지저분하게 일어나있었다. 그걸 잡아 벗겨내자 남자가 으으, 아픈 소리를 냈다. 해진이 깜짝 놀라 남자를 올려다봤다. 아파? 미안.. 몰랐어. 해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남자는 저를 보는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마치 털 달린 어떤 동물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 연고를 꺼냈다. 검지에 연고를 짜고, 남자의 발에 펴 바르는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가히 장인 정신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남자는 간간히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어린 아이 같았다. 해진은 까딱이는 발가락을 내려다보다가, 아까 듣지 못 했던 이름이 문득 생각났다. 해진은 연고를 바르는 손길과도 같이 말했다. 

 

"이름.. 안 말해줬는데."


해진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남자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꼼지락대던 발가락의 움직임이 멈추었고 해진의 손 안에서 발을 빼내려 아주 살짝 힘을 주었던 것이다. 해진은 남자가 제게 주인님이라 부르면서도 이름은 말해주지 않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진은 발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말 안 해주면 아프게 할 거야. 쓸데없는 고집이었지만 적어도 남자에게는 먹힌 모양이었다. 머리 위에서 이름..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아까처럼 입술을 깨물면서 해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버릇인 것 같았다. 안드로이드에게도 버릇이 있나. 저것 역시 프로그램 자체적으로 입력된 기능일까. 저런 건 필요없을 텐데. 해진은 생각하면서, 내 이름은 이해진이야. 네 이름도 알려줘.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주어 발음했다. 입술은 깨물지 마.. 아프잖아. 그리고 그렇게 덧붙이고 나서야 남자는 아랫입술을 놓아주었다.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해진은 다시 말했다. 이름. 알려줘. 그리고 입꼬리를 살며시 끌어올렸다. 강요로 받아들여지는 걸 바라진 않았다. 남자는 부풀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해진이 웃었을 때 비로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류환."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해진은 자신이 들은 것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발음을 잡아내며 원, 류, 환? 하고 남자에게 다시 재확인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류환.. 생각보다 근사하고, 어딘지 옛날 냄새가 풍기는 이름이었다. 이름이 부끄러워 숨기는 것이다, 라는 해진의 첫 번째 가정은 그렇게 탈락되었다. 해진은 두어번 남자의 이름을 되뇌며 연고가 다 발린 발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잘게 긁힌 상처를 제외하고 네 군데 정도에만 붙이면 되었다. 다 됐다. 해진이 발을 놓아주자 류환은 다리를 쭉 뻗어 반창고가 붙은 발을 빤히 쳐다보았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는 얼굴에는 신기함과 비슷한 감정이 묻어있었다. 해진은 류환의 반응에 괜히 쑥쓰러워졌다. 따져보면 류환을 다치게 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비록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해진은 머쓱하게 제 머리를 쓸어내리면서 류환의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 이내 류환과 떨어진 거리가 신경쓰여 엉덩이를 옆으로 더 당겨 앉았다. 류환은 좁아진 해진과 제 거리를 확인하고서, 해진을 향해 웃어보였다. 해진은 류환이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류환아. 해진은 바로 옆에 있는 류환을 소리내 불렀다. 네. 다만 따라오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진은 미처 묻지 못 했던 다른 한 가지를 떠올렸다. 나이. 해진은 류환과 눈을 맞추면서 물었다. 나이는, 몇 살이야? 류환은 스물 넷이라고 대답했다. 해진은 BP-5446이 처음 출시됐던 해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지 가늠했다. 3년. 류환은 단지 24살로 '제작'되었을 뿐이었다. 해진은 다시 한 번 류환을 불렀다. 류환아. 저를 향한 눈동자를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해진은 문득 류환의 눈꼬리가 새침하다고 생각했다.


"해진아. 라고 불러줘."


류환은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


해진도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보다 어리니까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그래도.."

"불러줘. 해진아. 하고."


류환은 제 이름을 말할 때보다 더 오래간 망설였다. 입술을 깨물려고 할 때면 해진이 하지 못 하도록 막았다. 류환은 혼란스러워보였다. 해진은 혼란스러울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류환이 자신을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인의 명령을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아. 해진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명령이야. 그리고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 덧붙였다. 류환은 여전히 머뭇거렸지만, '명령'이라는 단어가 효과적이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해진아." 


해진은 반 정도 만족했다. 류환이 그 세 음절을 발음하는 동안 죄를 범하는 어린 양 같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진은 저를 동생처럼 대하는 류환을 원했다. 해진은 열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와 무거운 것을 짊어진 듯 축 처진 아버지의 어깨, 어른스럽게 행동하기를 '소리 없이' 강요받았던 자신의 어린 날, 그리고 칙칙한 집 안에서 홀로 느꼈던 외로움이나 서러움 따위를 곱씹었다. 해진은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는 울어본 적이 없었다. 울어도 위로해줄 사람이 없었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아버지에게 부담이나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해진은 어쩌면 눈앞의 안드로이드가 지난 8년 간 지나쳐 온 생일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열여덟 번째 생일 역시 이미 두 달이나 지나있었고, 류환은 그저 버려진 안드로이드일 뿐이었지만. 


해진은 BP-5446의 사용설명서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마 설정을 건드리면 류환은 '주인님'이라는 경직된 단어보다 해진아라는 말을 더 쉽고 다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