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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류환
잠파노

방명록

 

1.

고양이를 주웠다. 황재오는 바른 자세로 앉아 이 문장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 고민했다. 기억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어제 술을 마셨고, 혼자서 집에 왔고, 침대에 엎어져 잠을 잤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뜬 지금에야 일어났는데, 품에 까만 고양이(기억에 전혀 없는)가 있었다. 황재오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다. 황재오는 애완동물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었다. 삶이 외롭기는 했지만(황재오에게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있기는 하였다) 이 집에 짐승은 자기 한 마리면 족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짐승 하나를 집에 더 들이는 수고로움을 굳이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귀를 탁탁 털면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고양이가 침대 위에 버젓이 있는 걸로 보아 '고양이를 주웠다'는 명제는 확실히 참이었다. 옷에 검은 털이 듬성듬성 묻어있었다. 애초에 끌어안고 잔 모양이었다. 황재오는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술에 취하면 무언가 하나씩 꼭 주워오기는 했으나 본격적으로 살아 숨쉬는 생명체를 주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씨발.. 황재오는 욕을 씹었다. 귀찮았다.


그 때 고양이가 느리게 눈을 떴다. 가늘던 동공이 점점 커졌고, 하품을 쩍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몸동작이 상당히 우아했지만 황재오가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황재오는 털로 범벅된 이불 때문에 짜증이 났다. 내가 이걸 왜 주웠지. 시발. 서랍 속에 테이프가 있던가 가늠하며 제 술버릇을 욕하기 바빴다. 그러는 동안 고양이는 황재오의 다리 위로 가볍게 올라왔다. 시발 뭐야. 황재오는 움찔했지만 굳이 고양이를 들어 올리거나 던지지는 않았다. 고양이는 아빠 다리를 한 황재오의 종아리와 가랑이 사이에 앉고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야옹. 그렇게 한번 울고는 긴 꼬리로 황재오의 허벅지를 탁탁 치며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편안하다는 듯이. 황재오는 마치 10년 동안 키워온 고양이를 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얘 뭐야? 나 알아?


일단 숙취를 해소해야 했으므로, 황재오는 제 다리 위에서 막 잠들은 고양이를 조심스럽게(조심스럽게! 황재오의 인생을 통틀어 조심스럽게 라는 형용사가 쓰일 일은 거의 없었다. 이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들어올려 침대 위로 내려놨다. 꽤 예민한 모양인지(본인 손길이 투박했으리란 생각은 못 했다) 금방 잠에서 깼다. 황재오는 그러거나 말거나 침대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북어국을 끓일 정성은 없고 라면이라도 끓여먹을 요량이었다. 저 고양이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먹고 나서 생각할 거였지만 어차피 결론은 다시 내다 버리는 쪽으로 날 것이었다. 저걸 어떻게 키워. 이미 말했듯이 황재오는 본인 몸 하나도 제대로 챙기기 버거운 인간이었다. 


고양이는 꼬리를 휘저으며 황재오의 뒷모습을 마냥 쳐다보다가, 바닥으로 폴싹 뛰어내려 황재오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황재오는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리다가 언제 왔는지 제 발 밑에 고양이가 있는 걸 알고 기겁했다. 아 시발! 기척이라도 내든가! 내가 밟았으면 어쩌려고! 화를 내는 방향이 황재오답지 않게 매우 인도적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고양이는 그저 야옹. 울 뿐이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망울이 마치 슈렉에 나오는 장화신은 고양이 같아서 황재오는 화를 낸 것이 괜히 미안해졌다. 황재오는 미안하다는 감정을 별로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낯설었다. 시발.. 황재오는 입에 달라붙은 욕을 버릇처럼 내뱉으며 계란을 꺼내러 냉장고로 갔다. 고양이는 또 따라왔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 황재오의 동선을 모두 따라다녔다. 황재오는 대체 오늘 처음 본 고양이가 저를 주인처럼 따라다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탁자에 앉아 라면을 먹을 때도 고양이는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저를 빤히 쳐다봤다. 야옹. 가끔 울면서. 황재오는 젓가락을 테이블에 세게 내려놨다. 


"시발 밥도 못 먹게. 너 배고파서 그래?"


고양이는 마치 대답하는 듯이 야옹거렸고, 황재오는 한숨을 푹 쉬면서 큰맘 먹고 찬장에서 참치 캔을 꺼내왔다. 나도 자주 안 먹는 건데.. 그런데 그냥 주려니 뭔가 걸렸다. 황재오는 텔레비전을 자주 봤다. 어디서 본 게 많았다는 뜻이다. 기름을 빼고 물에 대충 헹궜다. 본인이 먹는 음식에도 이런 정성을 보인 적은 없었다. 납작한 접시에 참치를 붓고 탁자에 올려놓자 고양이가 의자에 올라가(역시 황재오를 졸졸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그릇에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뭔가 상당히 기분이 좋은지 높게 가르랑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황재오는 다시 한 번 본인이 낯설어졌다. 알 수 없는 뿌듯함이 가슴을 간질이는 것이었다. 


미쳤나봐. 황재오는 방금 전 느낀 뿌듯함에 대해 그렇게 정의했다. 그리고 면발을 빨아들이고 국물을 들이켰다. 뜨거운 국물이 속에 들어가니까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제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젓가락을 딱딱 거리며 고양이에게 느긋하게 시선을 주었다. 온 몸이 까만 털로 덮여있었고, 눈동자는 호박색이었다. 본인이 어제 밤에 주워왔으니 떠돌아다니는 버려진 고양이임이 분명한데 털에 흐르는 윤기도 그렇고 그냥 딱 보기에 비싼 품종 같았다. 다만 오른쪽 귀가 3센티 정도 찢어져 있었다. 가위로 잘린 건지 어쩐 건지 절단면이 아주 깔끔했다. 흠. 황재오는 수염이 짧게 자라난 턱을 매만졌다. 얠 어쩌지. 막상 갖다버리려니 마치 키우던 걸 내버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어제 주운 건데도 그랬다. 평소라면 애옹애옹하는 소리도 음산하다며 쌍욕을 내뱉었을 진데 저 놈이 우는 건 그냥 귀여웠다. 사뿐사뿐 따라다니는 것도 귀여웠다. 온몸이 까만데 네 발만 양말 신을 것처럼 하얘서 솜뭉치 같았다. 솜뭉치로 바닥을 총총 걸어다니는 게 퍽 애비미소를 자아낼 만큼 귀여웠다. 황재오는 그쯤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키우는 것은 무리였다. 고양이는 황재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동공을 크게 키우고 황재오를 쳐다봤다. 


"그렇게 보지 마."


나는 너 못 키워.. 황재오는 냄비를 싱크대에 몹시 전투적인 모양새로 처넣고 제 종아리에 얼굴을 부비는 고양이를 들어올렸다. 


"가자."


그리고 슬리퍼에 발을 대충 끼워넣고 집을 나섰다. 고양이는 쉴 새 없이 울었다. 




2.

결과만 말하자면, 실패였다.


황재오는 근처 쓰레기장에 고양이를 내려놓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집으로 갔다. 도어락을 푸는 동안 발밑에서 고양이가 야옹거렸다. 황재오는 한숨을 쉬고 다시 쓰레기장으로 데려갔다. 몇 발자국 걷다가 뒤를 보니 고양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따라오지 마." 그렇게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황재오가 멈추는 족족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야옹야옹 애타게 우는 것이었다. 황재오는 귀찮고 짜증이 났고 마음이 약해졌다. 이해랑이 본다면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며 30분 정도는 웃을 일이었다. 천하의 황재오가 고양이 한 마리를 못 이겨 푸하학. 이해랑의 대사가 귓가에 공명하는 듯했다. 황재오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황재오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따 라 오 지 말 라 고 했 지"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러나 고양이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어서 통하지가 않았다. 결국 처음과 같은 짓을 세 번 반복하고 난 뒤에야, 황재오는 포기했다. 고양이가 제 다리에 매달려 꼬리를 살랑살랑 휘젓고 있었다. 야옹. 그 소리가 마치 날 버리지 마.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황재오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 조그마한 짐승 하나 못 이겨서 이러고 있다는 게 웃겼다. 황재오는 쭈그려 앉았다. 시발.. 역시나 버릇처럼 욕을 뇌까리면서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눈을 가늘게 감고 황재오의 손길을 받아냈다. 


"술이 웬수다."

"야옹."


황재오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일단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것은 검색이었다. 인터넷에 따르면 황재오가 주워온 고양이는 '개냥이'였다. 시발 개면 개고 고양이면 고양이지 개냥이는 뭐야. 황재오는 그 단어를 보자마자 비아냥거렸다. 아무튼 애교가 많은 고양이를 지칭하는 단어라고 했다. 애교가 많기는 했다. 지금도 노트북 키보드 위에 몸을 깔고 앉아서 솜뭉치 같은 발로 황재오의 손을 잡으려고 안달이었다. 이건 귀엽지 않고 귀찮았다. 저리 가라니까? 손을 휘젓다가 몸통을 들어 올려 책상 밑으로 내려놓자 다시 올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타협을 본 게 황재오의 허벅지 위였다. 꽤 마음에 들었는지 아주 얌전했다. 황재오는 이제 고양이 용품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모래.. 사료.. 캣 타워.. 캣 타워? 시발 이건 뭐야. 패스. 아무튼 이것저것 알아보니 돈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황재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아오.. 진짜 술이 웬수였다. 고양이 한 마리를 더 주워오기 전에 당분간은 금주를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까지 스쳤다.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건 좀 아니었다. 일단 집 안을 고양이 똥과 오줌으로 더럽힐 순 없었기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만 주문하고 바닥 난 알바비에 잠시 애도하며 허벅지 위에서 신선놀음 하고 있는 고양이를 툭툭 쳤다.


"내려가."


그러자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바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황재오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까는 죽어도 못 알아듣는 것 같더니.. 나 속은 거야? 짐승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굉장히 멍청해진 것 같아서 그 생각은 그쯤 하기로 했다. 황재오는 서랍장에서 테이프를 꺼냈다. 이제 털을 떼어낼 차례였다. 침대 위에 올라가서 테이프로 찍찍 털을 떼고 있는데 어디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들추니 뭔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손으로 집어보니 팔찌 같았는데, 그런 게 이 집에 있을 리 없으니 아무래도 고양이 목에 걸려있던 것인 듯했다. 네모난 금속면 위에 이름이 적혀있었다. '류환'


"'류환'? 사람 이름 아냐 이거?"


혼잣말로 중얼거린 거였는데 침대 밑에 있던 고양이에게 들렸는지(혼잣말치고는 목소리가 상당히 크긴 했다) 고양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올라오지 말라니깐! 털 묻는다고! 그렇게 호통 치면서도 이름표와 고양이를 번갈아 보면서, 너 이름이 류환이야? 하고 물었다. 귀가 다시 쫑긋 섰고, 대답하듯이 야옹거렸다.


"네 주인도 이상하다. 고양이 이름을 무슨 사람처럼.."


그래도 자기 이름이라니까 별 수 없었다. 황재오는 목걸이를 고양이에게 걸어주며 나중에 지어주려고 내심 생각해놨던 '나비'나 '미미', '초코' 따위의 이름을 폐기처리 해야 했다. 


대충 정리를 끝내고 나니(한 것도 없었지만) 당장 고양이.. 그러니까, '류환이'에게 줄 저녁이 없었다.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주문한 건 늦으면 화요일이나 되어야 올 것이었다. 황재오는 다시 돈 써야 하는 일이 생겼음에 통탄했다. 지갑을 챙기고 사료를 사러 나가기 위해 슬리퍼를 신었다. 고양.. 아니 류환이는 멀찍이 떨어져서 귀를 축 늘어뜨리고 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죽어도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필사적으로 쫓아다니더니 현관 쪽으로 향하니까 아까처럼 버려질까봐 걱정 돼서인지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안쓰러운 마음이 3초 정도 황재오의 곁을 머물렀다가 지나갔다. 곰도 100일은 마늘과 쑥을 먹어야 사람이 된다는데 저깟 고양이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황재오는 사람으로 환골탈태한 기분이었다. 오늘만 대체 생소한 기분을 몇 번이나 느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신이시여.


"밥 사올 테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


황재오는 동물농장 따위를 보며 무수히 들어왔던 말을 스스로 내뱉는 순간 통제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환이는 야옹 울었다. 이쯤 되면 황재오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었다.




3.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주말이 가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황재오는 난감했다.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도 수업에 빠지면 F였다. 가야만 했다. 류환이는 황재오가 듣지 못한 알람을 대신 듣고 일어나 볼을 할짝할짝 핥으며 황재오를 깨웠다. 까슬까슬한 혓바닥이 볼을 간지럽히는 기분에 눈을 뜨자 류환이는 솜뭉치로 황재오의 코를 툭툭 때렸다. 간질인 거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때리는 모양새였다. 황재오는 아침잠이 많았다. 일어나기 싫었다. 손을 뻗어 류환이를 품에 가두며 아으으으 목청으로만 기지개를 폈다. 품에 보드랍고 작고 따뜻한 것이 안겨있으니 퍽 기분이 좋았다. 황재오는 애완동물 따위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던 자신의 지난 날을 후회했다. 무지한 중생아. 확실히 귀찮기는 해도 기분은 상쾌했다. 칙칙했던 집안에 파스텔톤 색깔이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난감했다. 널 두고 내가 어떻게 학교에 가니.. 신발까지 다 신고 현관에 쭈그려 앉아 류환이 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황재오의 모습은 마치 드라마 속에서 하루 만에 여자에게 사랑에 빠진 팔불출 남자주인공 같았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해랑이라든가 이해랑, 이해랑이 봤다면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형 다녀올게."

야옹.

"집 잘 지키고."

야옹.

"울지 말고.."

야옹.


(고양이 언어를 번역하는 기계가 있다면 세 번째 '야옹'은 알았으니 제발 가. 정도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학교에서 해랑은 황재오를 보자마자 너 그 날 집에는 잘 들어갔냐? 물었다. 카톡으로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말이었는데 해랑은 남자들이랑은 카톡을 안 했다. 황재오는 고개를 저으면서 기자들 앞에서 처참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경찰청장처럼 말했다.


"잘은 무슨.. 시발 고양이 주웠어."

"헐."


내가 너 언젠간 그럴 줄 알았다. 해랑은 한심한 아우를 보는 형님마냥 무심하게 받아쳤다.


"어떻게 했어? 다시 버렸지?"


순간 황재오가 해랑을 쳐다봤는데, 그 시선이 '네가 사람이냐' 라고 말하는 듯해서 해랑은 굉장히 억울해졌다. 


"자꾸 쫓아와서 그냥 키우기로 했다."

"허얼. 대박."


해랑이 여태껏 황재오를 지켜봐 온 결과 황재오는 정에 호소하는 타입이 아니었거니와 호소 당하는 타입은 더욱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해랑은 조금 황당했다. 게다가 황재오와 고양이 조합은 상상하기가 힘겨웠다. 아니, 황재오와 동물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다. 모란시장에서 개 팔고 있는 황재오라면 또 모를까.. 그건 잘 어울렸다. 해랑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푸훕 웃었다. 시발 왜 웃어? 황재오가 으르렁거렸다. 저 성질머리로 고양이를 키운다니.. 해랑은 고양이의 안위가 걱정될 판이었다.


"잘 키울 수 있겠냐? 책임 못 질 것 같으면 그냥 다른 데다 입양을 보내든가.." 


그게 그 고양이를 위한 일이야. 해랑은 슬기롭게 뒷말은 생략했다. 그러나 황재오의 반응은 단호했다. 내가 키울 거야. 그 말을 시작으로 황재오는 거친 욕을 중간중간 첨부하며 고양이 예찬을 펼쳤다. 분명 본인으로선 고양이 때문에 귀찮아 죽겠음을 피력하는 듯했는데, 듣는 해랑으로선 모든 말이 '귀여워서 죽겠다'로 들렸다. 잠 잘 때마다 품에 파고드는데 존나 귀찮아. 어디 갈 때마다 따라오는데 존나 귀찮아. 아침에 혀로 얼굴을 핥는 바람에 깼잖아. 시발. 존나 귀찮아. 밥 챙겨주는 거 존나 귀찮아. 근데 진짜 맛있게 먹어. 아무튼 귀찮아.. 차라리 표정이라도 정말 귀찮아하든가. 해랑은 혀를 찼다. 끝났네. 황재오. 해랑은 고양이를 끌어안고 자는 황재오를 상상하는 순간 자기 안의 황재오가 처참히 무너짐을 느꼈다. 대체 그 고양이가 어쨌길래. 심지어 이름은 언제 지어줬는지 류환이라고 불렀다. 해랑은 헛웃음을 지었다. 만일 황재오가 후보로 세운 이름이 나비, 미미, 초코였다는 걸 알았다면 기절했을 노릇이었다.


해랑은 황재오를 이렇게 만든 그 고양이를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4.  

해랑은 동물을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황재오보다는 좋아했고, 동물들도 대체로 해랑을 잘 따랐다. 슬프게도 황재오의 고양이는 예외였던 모양인지, 해랑이 저를 쓰다듬으려고 할 때마다 귀를 가로로 젖히며 불편한 내색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캬앙! 이빨을 드러내고 양말 신은 발로 해랑의 손을 가차없이 내치기도 했다. 해랑은 상처받지는 않았지만 자존심에 금이 가기는 했다. 고양이(곧 죽어도 류환이라고는 부를 수가 없었다. 그건.. 너무 사람 같았다)는 그런 주제에 제 주인이랍시고 황재오의 발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황재오의 발목을 핥으며 애옹거렸다. 해랑은 짐승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능력은 없었지만 저 울음소리가 아마도 "좋아해."에 가까운 의미일 거라고 생각했다.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던 것이다. 해랑은 사랑받는 황재오, 심지어 동물에게 사랑받는 황재오를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으로는 7대 불가사의 따위가 어지럽게 흩어졌는데, 아마 거기에 지금 눈앞의 광경을 추가한다더라도 논란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놀랍고 신비롭고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짜증났다. 그건 저를 보고 있는 황재오의 표정 때문이었다. 저 위풍당당함이라니. 마치 '이겼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해랑은 "참나" 진심을 담아 내뱉었다. 해랑은 황재오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한 대 툭 때리고 이렇게 따지고 싶었다. "네가 뭘 이겼는데?" 하지만 해랑은 속으로 삭이는 쪽을 택했다. 호박색 눈동자가 해랑을 주시하고 있었다. 해랑은 굳이 나서서 팔뚝에 발톱 자국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고양이는 어느 새 황재오의 허벅지 위에 앉아있었다. 두 발로 서서는 황재오를 향해 앞발을 자꾸 뻗었던 것이다. 황재오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고양이를 들어올려 제 허벅지 위로 고양이를 내려놨다. 해랑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커플 사이에 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랑이 빤히 쳐다보자 고양이는 황재오의 손길을 받아내며 눈을 나른하게 몇 번 감다가, 머리를 돌렸다. 해랑을 무시하겠다는 의도가 아주 노골적으로 담긴 행동이었다.

 

"쟤는 내가 싫은가봐." 

"사람 볼 줄 아는 거지." 

"역시 헛소리 메이커 황재오. 그렇게 따지면 쟨 네가 풀어줬을 때 진작에 달아났어 븅신아." 

 

솔직히 사실이었다. 

 

"뭐 시발아?" 

 

해랑은 혀를 쭉 내밀고 황재오를 약올렸다. 황재오는 몇 번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한숨을 푹 쉬곤 관두었다. 너를 상대해서 무엇하랴 따위의 쓸모없는 관용을 베푸는 척 했지만 진짜 이유는 허벅지에 앉아있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해랑은 얼굴을 구겼다. 그냥 목덜미 잡아서 내려놓으면 되잖아? 해랑은 황재오가 멍청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황재오는 "그럼 아프잖아."라고 대답함으로써 해랑의 넋을 완전히 나가게끔 만들었다. 해랑은 순간 묘한 데자뷰를 느꼈다. 사실 아까부터 왠지 모를 익숙함이 해랑의 머릿속을 간질이고 있었다. 얘랑 비슷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리고 해랑이 몇 초간 기억을 뒤져 비로소 찾아낸 건 

 

"너 존나 우리 아빠 같아." 

 

본인의 아버지였다. 

 

"개 키우는 거 엄청 반대하더니 나중엔 직접 산책도 시키고 두산이(백두산. 해랑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죽었을 때 제일 슬퍼했던 우리 아빠."

"개소리한다." 

 

황재오는 비웃었지만 예의 그 발끈거림을 보여주지는 못 했다. 본인도 부정하진 못 하겠지. 해랑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지금의 황재오는 적응은 되지 않았지만 보는 재미는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패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녁이나 얻어먹고 갈 생각이었는데, 고양이와 같은 식탁에서 먹는 것도 모자라(황재오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사료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놨고, 고양이는 식탁 '위'에 올라왔다) 딱 봐도 터무니없어 보이는 양의 라면이 제 앞에 놓여 있었다. 해랑은 라면 그릇과 황재오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황당함을 아주 적극적으로 내비췄다. 그릇에 담긴 라면은 성인 남자 기준에 한참 모자랄 뿐더러 솔직히 여자들도 라면 하나를 해치우는 마당에 이건 너무한 것 같았다. 아마 반 개 정도 돼보였다. 국물만 많았다. 

 

"황재오." 

 

고양이는 잠깐 해랑의 쪽을 봤다가 다시 사료 먹기에 열중했다. 

 

"왜." 

"넌 이게 말이 되는 양이라고 생각하냐?" 

 

제 그릇과는 다르게 고양이 밥그릇에는 사료가 잔뜩이었다. 밥으로 치면 고봉밥. 하물며 저 고양이도 배부르게 밥을 먹는데. 하지만 황재오는 당당했다.  


"나 쟤(밥이 맛있는지 매우 행복한 소리를 내면서 사료를 먹고 있는 '류환이'를 젓가락으로 가리켰다) 때문에 거지거든? 그거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라. 나 먹을 것도 없어. 억울하면 니네 집 가서 처먹는가."  


실제로 통장 잔고가 거의 0에 수렴한 상태였다. 완전히 0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주일이면 금방 바닥날 돈이었다. 황재오는 성질머리를 못 이겨 알바를 관두었던 것을 사무치게 후회했다. 계획대로 사는 인생은 아니었지만 고양이를 키우는 것은 황재오의 인생 계획에 전혀 없는 사항이었다. 황재오는 며칠 뒤에 엄마에게 용돈을 더 보내달라고 보챌 생각이었다. 해랑에게는 어서 꺼져달라고 보챌 생각이었고.  


"너 존나 짜증나." 

"네가 더. 그치 류환아?" 

 

야옹. 

 

"쟤도 그렇다잖아." 

"와.." 

 

해랑은 자신과 자신의 여자 친구와 함께 밥을 먹었던 어떤 남자후배가 느낀 기분이 이러했을까 생각했다. 식욕이 아주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던 것이다.




5. 

류환이는 잠이 오면 황재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황재오는 "귀찮아 죽겠네.." 라고 말하면서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류환이를 끌어안아 주었다. 류환이는 황재오의 팔 안에 갇히면 만족스러운 듯 야옹거렸다. 황재오도 그게 싫지 않았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이불에 털이 묻는 것쯤은 이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일일이 떼어내기도 귀찮았거니와 어차피 쭉 키울 텐데 털에 연연하다가는 스트레스로 류환이보다 먼저 저 세상에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황재오 자체도 깔끔한 성격이 못 되었다. 단지 짐승의 털이라기에 유난을 떨어본 것 뿐이었다. 황재오는 류환이의 양쪽 귀 사이를 긁듯이 만져주면서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류환이는 자세가 조금 불편한 듯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금세 곧 잠들었다. 

 

사방이 고요했고 간간히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바깥에서 나는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가까워서, 황재오는 잠시 동안 저 귀뚜라미(아마 베란다 쪽에 있는 것 같았다)를 어떻게 조질지 생각했다. 어쨌든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황재오는 아주 작게 웃었다. 콧바람이 귀에 닿았는지 류환이가 귀를 조금 움직였다. 황재오는 류환이의 몸을 천천히 쓰다듬어주면서 서서히 눈을 감았다. 

 

알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황재오는 품에서 당연히 만져져야 할 털뭉치가 없음에 잠시 당황했다가(얼굴을 핥는 뜨겁고 축축한 감각의 부재는 허전하기까지 했다) 그 털뭉치가 화장실 앞에 놓아둔 물그릇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그리고, 내가 뭘 걱정한 거지? 황재오는 떠오르는 의문에 다시 당황했다. 고작 며칠만에 저 고양이에게 익숙해졌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황재오는 스스로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해랑이 눈썹을 모으며 자신을 바이러스 취급했던 것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류환이는 앞발로 몇 번 세수를 하다가 침대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왔다.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오르는 몸짓은 가볍고 날렵했지만 그대로 허벅지 위에 앉는 모습은 새침한 고양이 이미지와는 거리가 상당했다. 황재오는 힘없이 한숨을 내뱉으면서 류환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넣고 들어올렸다. 초롱초롱한 호박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찢어진 귀 뒤로 길쭉한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황재오는 다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예쁘면 된 거지.."  무엇인가에 감화되기에는 너무 촉박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황재오는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눈앞의 류환이는 귀여웠고 예뻤고 사랑스러웠으므로 류환이를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자신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학교에서 황재오는 기분이 산뜻했다. 택배기사로부터 배달물이 오늘 오후에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류환이에게 쾌적한 배변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치 못 했던 곳에서 일어났다. 마땅히 할 것도 없으면서 놀러가자고 붙잡는 해랑을 뿌리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하늘이 훤했고, 손목시계의 시침은 4를 가리키고 있었으며, 황재오가 생각하는 '오후'의 기준은 저녁 6시 이후였다. 아주 여유롭게 택배를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황재오는 문자를 확인하고 눈을 두 번 감았다가 떴다. 배송 완료. 수취인 황재오님. 황재오는 고등학생일 때 들었던 택배를 숨겨놨으니 잘 찾으라던 말 이후 두번째로 보는 헛소리에 조용히 욕을 씹어 뱉었다. 씨발 뭔 개소리야. 황재오는 택배 기사에게 전화했다. 예 xxx동 xx번지인데요. 택배기사는 아아--- 하고 길게 소리를 끌더니 뭔가 사람을 꺼리는 듯한 뉘앙스를 진하게 풍기면서 무슨 문제라도..? 하고 물었다. 문제야 많았다. 

 

"제가 지금 밖인데 택배를 받았다고 문자가 와서요." 

"아.. 네? 집에.. 사람이 있.. 계시던데.. 본인이 황재오 씨라고.." 

"예?"


황재오는 무슨 개소리야, 라고 말하는 대신에 발걸음을 빨리했다. 거의 뛰는 것에 가까웠다. 머릿속으로 류환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 하나 있기는 했다. 엉망으로 뒤집어진 침대. 어째서 그런 게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이불에 붙어있는 검은 털 하나가 크게 확대되는 순간 황재오는 다시 욕을 씹었다. 씨발. 씨발. 어떤 개새끼인지는 몰라도 조져놓으리라 생각했다. 황재오는 뛰면서 해랑에게 전화했다. 귀찮다고 버리더니 어쩐 일이냐고 특유의 목소리로 비꼬는 것이 들렸으나 상대해 줄 정신이 아니었다. 씨발 우리 집에 도둑 들었으니까 일단 와! 소리치듯이 말하고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자취집이 학교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 5분을 쉬지 않고 뛰고 나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숨을 고를 만도 했지만 손은 급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전자음이 네 번 이어지고 나서 문이 열렸다. 거칠게 문을 열고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뛰어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황재오는 이불을 옷처럼 두르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이성이 환각처럼 멀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황재오는 얼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사실 달려들기도 전에 그 남자가 황재오에게 달려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기에 그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10년 만에 만나는 그리움에 사무친 가족이나 연인 같았다. 황재오는 불쑥 제 목에 팔을 두르는 남자 때문에 당황했다가 남자의 어깨 아래가 전부 살색이라는 것에 두 번 당황했다. 이거 변탠가..? 황재오는 어째서 생각조차 안 해본 일들이 이토록 짧은 시간동안 연달아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황재오는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세게 떼어냈다. 남자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밀착하려는 시도를 몇 번이나 했던 탓에, 아래에서 물컹한 무언가(그게 뭔지 명백하게 알고 있었지만 무엇인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에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았다. 남자가 떨어지고 난 다음엔 더 가관이었다. 황재오는 시선을 아래에 두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씨발.. 당신 뭐야."


황재오는 남자가 자신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일단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남자는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약간 겁먹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는데, 뭔가 보기에 백치이거나 백치에 가까운 사람 같아 상대하는 것도 무리인 것 같았다. 황재오는 저 남자가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왜 들어왔는지 왜 벗고 있는지 등등의 사항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집 안을 둘러보며 류환이를 찾았다. 류환아. 류환아? 류환아. 이름을 여러 번 불러봤지만 류환이의 꼬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남자는 황재오를 졸졸 쫓아다녔다. 황재오는 다시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들춰본 베개 밑에마저 류환이는 없었다. 사실 그 밑에 류환이가 있을 거란 것도 우스운 상상이었지만 황재오는 그 정도로 절박했다. 절박? 그게 아주 어울리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것과 비슷한 감정이기는 했다.


황재오는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전히 벌거벗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민망하다거나 흉하다거나 하는 감상은 들지 않았다. 황재오가 궁금한 것은 오로지 류환이의 행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잡을 곳이 없었다. 주먹을 날릴까도 생각해 봤는데, 역시 백치를 상대로 그건 아니었다. 황재오는 성격이 개차반이기는 했어도 학창시절 도덕을 배웠기에 도리라는 것을 아는 남자였다. 황재오는 결국 남자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아주 진지하게 눈을 맞추면서 물었다.


"우리 류환이 어떻게 했어?"


남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다만 겁먹은 얼굴을 하고 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느라 바빴다. 황재오는 여섯 살짜리 아이를 야단치는 유치원 선생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왜 내 집에 무단 침입한 변태를 보면서 이런 감상에 젖어야 하는가. 내 성질이 언제 이렇게 죽었지. 한심한 기분과 회의감이 몸을 감싸고돌았다. 황재오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질 듯한 아주 깊은 한숨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로 아주 익숙한 이름이 내려앉았다. '재오.'


"뭐?"

"재오.."


황재오는 택배 기사가 '본인이 황재오씨라고..'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우체통이라도 뒤졌나? 그러나 한글조차 모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생김새가 아니라 표정이나 행동에서 유추한 사실이었다. 남자는 재오, 라고 두 글자를 발음하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다. 발음이 아주 엉성하고 어눌했다. 그럼에도 여러 번 되뇌었다.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서슬 퍼렇게 쳐다보는 황재오 탓에 여전히 얼굴은 겁먹은 표정이었고, 머리 위로 솟은 삼각형의 귀도 축 처져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사실을 인식한 순간, 황재오는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귀? 


그러니까, 분명 귀가 맞았는데 그건 사람의 귀가 아니라 동물의 머리 위에 달려있어야 마땅한 털 달린 귀였다. 일단 상식적으로 사람의 귀는 얼굴 옆에 달려있지 머리 위로 솟아있지는 않았다. 황재오는 이게 꿈이길 바랐다. 그토록 현실감이 없었다. 류환이가 사라진 것도 꿈이고 이 눈앞의 남자 역시 꿈이고 그냥 아주 단순한 개꿈을 꾸는 것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꿈이 깨길 바라고 볼을 꼬집은 순간 지극히 현실적인 고통이 찾아왔다. 슬프게도 꿈은 아니었다. 남자는 다시 또 "재오.."하고 황재오를 불렀다. 황재오는 판타지 소설을 잘 읽지 않았다(책 자체와 거리가 멀었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너무 허무맹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보다 더 허무맹랑한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황재오는 남자의 귀(그러니까, 동물 귀.. 머리 위에 솟은)를 자세히 살폈다. 오른쪽 귀. 3센티의 찢어진 상처. 절단면이 깔끔한. 그 상처가 있기를 바라면서도 차라리 없었으면 했다. 정말로 이 남자가 류환이라면 황재오는 그 사실을 어떻게 감당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아득했다. 황재오는 손으로 귀를 잡았다. 실제 고양이 것에 비하면 꽤 크기가 큰 귀였다. 사람이 되어서 귀도 커진 걸까. 이제 슬슬 본인이 봐도 미쳤지 싶었다. 그리고 몇 초 후 황재오는 스스로의 바람과는 다르게 


"..류환이?"


그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귀의 상처. 류환이의 귀에 있던 것과 같았다. 손으로 매만지자 귀를 탁탁 털었다. 황재오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붙잡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그러나 이름이 불리자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면서 저를 끌어안는 류환이(신이시여) 때문에 곧 주저앉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실제로 다리에 힘이 빠졌지만 류환이(제발)가 안고 있는 탓에 주저앉을 수 없었다. 류환이(저를 구하소서)의 어깨 너머로는 까맣고 길쭉한 꼬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황재오는 정말이지 드물게 울고 싶어졌다.